오늘(6/27) 월요일 아침 말씀묵상 큐티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부르면서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1절). 누구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친밀했던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 메마른 광야에서도 절박한 심정으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바라고 사모한다고 합니다(1절).
여기 ‘영혼’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네페쉬]인데,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는데(창2:7), ‘살아있는 존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뱀(사단)의 유혹으로 사람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며 하나님처럼 되어 살겠다고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 당하면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흙’ 즉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게 되어,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고 썩어질 것만 갈망하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고전15:50).
‘영혼’ [네페쉬]는 갈망하는 인간인데 타락하니 생명이 아닌 썩을 것만 갈망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마음의 좋은 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기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엡2:3).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이런 세상이 된 것은 ‘사람’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창6:3).
‘육신’은 히브리어로 [바사르]입니다. [네페쉬]가 갈망하는 인간인데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런데 타락하고 나니 썩어질 것만 갈망하다가 멸망하는 인간 곧 [바사르]가 되었습니다.
이런 ‘육신’[바사르]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자기의 이름을 내는 일이 생의 최고의 갈망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은 이들과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다윗이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다윗의 ‘영혼’ [네페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간절히 주를 찾는데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고 합니다(1절). 여기 ‘육체’란 [바사르]입니다.
멸망할 인생이 썩어질 것을 갈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갈망하는 자체가 주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이 비록 메마른 광야일지라도 주께서 임재하시니 성전이/성소가 되는 것입니다(2절).
그래서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기에 입술로 주를 찬양하며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손을 들겠다고 합니다(3~4절). 주의 ‘인자함’이란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른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자함, 은혜와 사랑을 맛보았다면 지금 있는 곳이 메마른 광야라도 그곳이 성소가 되어 주님을 찬양하며 손을 드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침상에서도 주를 기억한다고 하면서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합니다(6~7절). 밤이든 새벽이든 주님과 동행하는 모습입니다.
주님이 나의 도움이 되신 것은 주의 날개 그늘에 피하여 들어갔기 때문이고,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는 것도 주의 오른손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8절). 여기 ‘나의 영혼’도 [네페쉬] 입니다.
육신이 된 존재 곧 [바사르]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섞어질 것을 갈망하지만, 영혼[네페쉬]은 썩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과 주님을 갈망하며 삽니다.
나도 다윗과 같이 주의 은혜를 입었으니 썩어질 것을 갈망하는 육신[바사르]로 살지 않고, 영혼[네페쉬]로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이 갈망은 나의 능력이나 노력이 아니라 주의 영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니 오늘도 주의 은혜로 인하여 어디에 있든지 주를 갈망하도록 성령님을 의지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