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4/12) 화요일 아침 말씀묵상 큐티를 합니다.
맹인이었던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복음에 눈을 뜨지만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전통과 형식에
매여서 점점 복음에 어두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리새인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정체를 두고, ‘안식일을 범한 죄인’과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라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14~16절).
안식일에 왜 맹인을 고치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침을 뱉어서 손으로 진흙을 이겨서 그 진흙을 들고 맹인의 눈에 발라 주기까지 했으니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 예수님이라는 것이고, 한쪽에서는
그래도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손톱도 못 깎습니다. 발을 삐어도
찬물로 냉수마찰도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평생 동안 앞을 못 보던 자가 눈을 뜨고 빛을 보게 된 것으로 인해 기뻐해도 부족한데, 율법을 내세우며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이고 전통과 형식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율법주의에 매어 본질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하고,
내용보다는 외형을 우선에 두고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성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까지도 율법주의에 매여 영의 눈이 흐려져서 잘못 보는
일들이 너무나도 자주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에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예배의 형식이나 예배 순서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비판을 합니다. 벌써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고치셔서, 암흑 세상에서 해방하여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14절). 그러므로 진정한
안식은 율법 한 조항을 지키는 것보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여 주님과 연합되어 있는 나는 요즘 빛 되신 주님 안에서 안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지…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치유하심으로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빛되신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에 주인이십니다. 원래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쉼을 누리는 날이었으나 그 목적과 달리 수많은 규정들을 지키려 하니 당시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지쳤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창2:2)하셨는데 히브리어에 보면 ‘날’이 [욤]인데 ‘day’도 되지만 ‘빛’도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빛 안에서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30:26에서는 ‘일곱 날’을 ‘빛’으로 번역했습니다.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일곱 째, 즉 안식일 날을 빛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안식일)은 빛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인나 요즘 안식일 교인들처럼 토요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두움에서
빛의 역사 가운데 들어가 있느냐?
내가 주님의 빛 속에 들어가 있느냐? 내가 빛 된
주님 안에서 참 쉼과 자유와 평안과 안식을 갖고 누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맹인된 자가 눈을 뜨고 빛을 보게 되어 자유와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는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전통과 형식에 매여서
자기들만의 신앙의 독단주의를 가지고 종교 의식을 절대화시키면서 사람들에게 짐을 주고 거기에 묶어
놓고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 어둠 가운데서 생명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안식일의 주인이신 참 빛이시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참된 쉼과 평안과 자유와 안식을 누리고 아직도 눈을 뜨는 못한 자들에게 담대하게 빛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