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3/17) 목요일 아침 말씀묵상 큐티를 합니다.
붙잡혀온 간음한 여자와 사람들 앞에서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잘 알고 사용하는 말입니다.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털어서 먼지 나지 않을 사람이 없는데’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책망할 수 있는가?’ 하면서 자기의 잘못과 실수와 범죄를 정당화 하는 일에 이용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다 죄인이니 너도 너를 정죄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덮으라고 말씀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11절)고 결론을 내셨습니다.
율법은 나를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그리고 사단도 나를 정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용서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만약 그 중에서 죄 없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간음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죄가 없는 한 분만이 돌로 칠 자격이 있었는데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돌로 치지 않으시고 돌 맞아야 마땅한 그 여인을, 예수님이 대신 그 죄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정죄함을 면하게 됩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 앞에 있는 이 간음한 여인과 같습니다. 이미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한 죄인인데, 예수님이 죄를 담당하심으로 여인이 용서받은 것처럼 나도 돌에 맞아 죽지 않고 용서받았습니다.
오늘 아침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흐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으리라”(롬8:1~2).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친히 저주를 받으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이 은혜를 내가 받았으니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 많이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간음한 이 여인이 용서를 받은 것은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헤를 입은 자가 이제 되었기에 은혜를 잊어 버리고 살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근거가 자기의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졌다면 그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율법은 이미 이 여인에게는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기에 이 여인에게는 율법의 저주가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와는 이미 사별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사별한 남편이고 이제는 새 남편이 생긴 것입니다 (롬7:1~6). 새 남편(새언약)은 마음에 법을 심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두게 되면 이때는 이들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언약의 내용입니다(렘31:31~34).
그러므로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새언약입니다. 이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 그 은혜의 새언약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마음에 말씀을 새긴다는 것은 성령님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은혜 아래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니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은혜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요16:9).
그러므로 이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은혜 아래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속에서 생수가 흐르듯이 주의 성령께서 나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 안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2). 성령님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갑니다.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자기의 행함으로 바꾸려고 하거나, 또는 예수님이 다 용서하였으니 이제 나는 내 마음대로 살자 하는 것도 죄입니다.
은혜를 무시해서 죄를 다시 짓지 말고 은혜만 붙들고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새언약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살라고 하시니 오늘도 성령님의 인도로 은혜만 꼭 붙잡고 복음만 믿는 믿음으로 죄짓지 않고 살겠습니다. |